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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雍正帝)왕조

15:09, September 25, 2011

서기 1723년 청나라 강희제 61년 11월 13일, 베이징의 구성(九城)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강희제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전국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황위의 계승자는 무려 40여년간 태자였던 이아가(二阿哥)도 경전과 역사에 정통했던 삼아가(三阿哥)도 현명함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팔아가(八阿哥)도 아니었으며,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 대장군왕 사십아가(十四阿哥)도 아닌 차가운 얼굴의 왕자로 알려진 사아가(四阿哥)인진(胤稹) 이었다.

인진의 발탁은 조정이나 백성들이 결코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강남지역에서 이재민들을 선동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며, 성곽에서 홍문연(초청한 사람을 모해할 목적으로 벌이는 주연)을 벌여 억지로 지방관 및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200만냥의 은화를 갈취하여 이재민을 도왔다. 그는 국고의 빚을 독촉하여 늙은 대신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으며, 황자대왕이 전문(前門)거리에서 가산을 처분하는 상황에 이르러 만주족 관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억울하게 투옥된 죄인들에 대해서 그는 수수방관하였고, 팔아거(八阿哥)와 태자를 치열한 투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관료들의 뇌물 수수행위에 대해서 그는 강하진(江夏鎭) 지역을 피로 물들여 태자를 다시 폐위하도록 만들었다. 인진의 황위는 결코 빼앗거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만든 것이 아니었으며, 아버지를 독살하여 얻은 것도 아니었으며, 바로 강희제로부터 물려 받은 자리였다. 강희제에 의해 황위에 오른 그가 바로 옹정제(雍正帝)이다.

황위에 오른 후 발생한 산시(山西)의 눠민(諾敏)사건, 과거시험 장소에서 발생한 부정행위에 대해 옹정제는 연루된 조정의 중신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서북 지역의 군사 반란과 여러 성에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군비와 재해 구조비용이 긴급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패한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러한 다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백성에 토지를 나누고, 재난은 국가가 해결한다.”, “선비들은 하나로 힘을 모아 일을 하고, 함께 양식을 만들어 낸다.”, “허난(河南)지역 시험 준비자들의 시험거부”, “철모자의 친왕이 대전(大殿)에서 관리들을 질책한다.” 등의 새로운 정치를 행하였다. 또한 관료와 향신들이 재물을 수탈하고 궁정 내에서의 투쟁을 일삼는 것을 막고, 역사적인 사건을 억누르는 등 이들을 취지로 한 일들을 완성해가며 옹정제(雍正帝)의 일생은 마감되었다.

Print(Editor:轩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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