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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康熙帝)왕조

15:09, September 25, 2011

청(淸)나라 순치(順治1638~1661) 18년, 황사궁(皇吏宫)에 악성 천연두가 유행하여,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후궁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순치제는 불(佛)제자가 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국세가 불안한 시기에 효장태후(孝庄1613~1688)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황제의 결정을 거치던 일들을 신하들에게 결정를 하게 하고 처리하게 하였다. 또한 천연두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되는 8세의 어린 왕자 현엽(玄燁 1654~1722)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강희제(康熙帝)이다. 강희제(康熙帝)는 즉위한 뒤에 오보이(鰲拜1610~1669)등의 권위높은 신하들의 기세에 눌려 효장태후 조차 굴욕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오보이가 정권을 섭렵한 가운데 강희제가 황권을 되찾으려 하자, 권신들은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하였다. 강희제는 이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끝에 오보이를 잡고 정적들을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오삼계(吳三桂1612~1678)등을 비롯한 삼번(三潘: 오삼계, 상지신(尙之信1636~1680),경정충(耿精忠1644~1682))은 자신들의 군대를 보유하고 세력을 넓히며, 각자의 지방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젊은 나이의 강희제는 삼번의 철폐를 명하지만, 이에 삼번은 반란을 일으킨다.(삼번의 난:1673~1681) 관군이 연이어 오삼계의 군대에 패배를 거듭하였고,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주삼태자(朱三1633~1708)는 이런 혼란한 틈을 타 청을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명나라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환관의 반란으로 궁정은 혼란에 휩싸였고, 강희제는 절망에 빠져들게 되어 제위에서 물러날 것까지 생각하였다. 하지만 효장태후의 질책과 격려를 통해 강희제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한(漢)인 관료인 주배공(周培功)을 기용하여 오삼계와 필사의 사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중국은 강희제(康熙帝)시대에 이미 국력을 크게 키웠고 나라는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정성공(鄭成功)의 후손이 타이완(臺灣)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키운 채 투항을 거부하였고, 몽골의 갈단(Galdan 1649~1697)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추대된 그는 베이징을 탈환해 올 것을 맹세하였다. 강희제는 갈단(Galdan)의 뜻을 꺾기 위하여 사랑하는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었다. 이로써 서북 지역을 안정시킨 후, 명장 스랑(施琅)을 기용하여 한번에 타이완을 되찾은 후에 방향을 돌려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광활한 몽골의 대초원에서 갈단(Galdan)과 생사를 건 결전을 벌이게 된다. 그리하여 갈단(Galdan)의 모든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고, 중화민족의 통일된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한 후, 효장 태후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권신들과 태자는 한패가 되어, 태자가 더 일찍 황제에 즉위하는 것을 도모하게 되자 강희제는 태자를 패하고, 이에 따른 혈육간의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연회를 벌이는 자리에서 강희제가 유언를 남기고자 하는 순간 옥좌에서 급사하고, 조서는 바람에 날려 계단에 떨어지니 아무도 그 비밀을 알 수 없게 되었다.

Print(Editor:轩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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