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6  中文·韓國

최재천(崔載千) 국회의원 인터뷰 (2)

  15:11, August 28, 2013



기자: 예,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의원님께서는 제3세계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일을 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최재천 국회의원: 뭐 뻔한 소리입니다만 저 혼자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수많은 분의 정성과 사랑 속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지 속에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외로움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받은 정성들을 국내에 돌려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국으로부터 수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도 한자를 받았고 유교문화를 받았고 불교를 받았고 도교를 받았고 수많은 문화와 문명과 심지어 이런 의자조차도 다 중국에서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언젠가는 그런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웃들과 나누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빚을 갚고 이런 지극히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기자: 혹시 그동안 지원하셨던 유학생 중에는 우리 중국 유학생들도 있었나요?

최재천 국회의원: 중국 유학생이 네 분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 감사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긴 시간 동안 인민망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민망 네티즌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씀 부탁합니다.

최재천 국회의원: 아, 제가 빠트린 게 하나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당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중 우호협력은 정치•경제 교류가 눈앞에 보이는 중심이 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시민들 간에, 양국 인민들 간에, 양국 네티즌들 간에, 꼭 지정학적인 영향을 받는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사이버 세상에서, 때로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 만나고 이해하고 학습하고 공동의 관심사를 토론하고 이런 것들이 양국의 우호 관계를 훨씬 더 깊고 넓고 미래지향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시민들도 이런 쪽에서 분명히 노력하고 있는 만큼 중국 쪽에서도 한국의 네티즌들과 시민들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빠트린 거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저기 있는 글씨가 탁본인데요. 사실 탁본도 중국에서 온 기술입니다. 거기 벽면에 보이는 글자가 고정실(古鼎室)입니다. ‘옛 고’자, ‘솥 정’자 ‘집 실’입니다. 옛날 솥이 있는 방, 옛날 문화가 있는 방 이런 뜻입니다. 그 왼쪽에 쓰신 분 글자가 있습니다. 완당(阮堂) 선생입니다. 완당 선생은 중국 양주시 출신인 완원(阮元) 선생을 존경해서 자기 호를 ‘완당’이라고 붙인 겁니다. 1810년 겨울에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완원 선생은 베이징에서 만납니다. 제가 최치원 선생 일로 중국 양주를 다니다가 어느 날 우연히 당성(唐城) 유적 비석에서 휙 스쳐 지나가는데 완원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한 10미터쯤 걸어가다가 되돌아와서 통역하는 분에게 “혹시 제가 방금 완원이라는 글자를 보지 않았나요? 혹시 저쪽 비석에 완원이라고 쓰여 있지 않나요?” 그랬더니 “아마도 써 있을 것 같다고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갔더니 내가 본 쪽이 아니라 그 뒤쪽에 글씨가 쓰여 있어요. 귀신들린 소리잖아요. 근데 전 볼 때 주먹만하게 글씨를 크게 봤거든요. ‘완원’ 이렇게. 근데 가서 보니까 내 손톱만 해요. 그게 뭘까요? 그래서 “완원이 왜 여기 적혀 있느냐?” “아 완원이 우리 동네 사람이야.” “아니 제가 아는 완원은 의징(儀徵) 사람이다. 의징은 우리 옛날 양주에 있는 동네다.” 그럼 “완원 선생 생가나 묘소가 있느냐?” “있다.” 날 가게 해달라고 했더니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다음번에 와 달라.” 다음번에 저희가 갔더니 옥수수밭에 무덤이 있더라고요. 그 겨울에 양복 입은 채로 흙 바닥에서 절을 하니까 중국 양주의 한중 우호를 책임지고 있는 관계자들이 충격을 받은 거예요. 제가 갈 때마다 완원 선생 관련 책을 사다 드립니다. 사실 완당은 한국에서 추사(秋史) 아닙니까? 추사. 가장 존경받는 대학자잖아요. 이 완원 선생으로부터 잠시 만나고 학맥을 이었다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았거든요. 얼마나 소중한 분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중국 양주시가 완원 선생 사당도 복원을 복원했고, 완원 선생 묘소도 성역화를 했고, 제가 완원 선생 후손들도 찾아서 제가 두 차례 만났습니다. 내년에 완원 후손들은 한국으로 초청을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완원과 완당의 TV시리즈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완원 선생과 관련된 세미나나 학술대회를 공동으로 할 것입니다. 한국에도 완원과 완당에 대한 비석을 세울 것이고 중국에도 저희가 완원과 완당에 대한 비석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이 완원 선생 탄신 250주년인데 음력으로 1일 20일에 저희가 거기에 갈 것입니다. 또, 이런 식으로 중국 양주를 다니면서 한중 우호 관계에 기여했던 옛 선연들을 발굴하고 그분들을 되살려서 오늘의 역사 인물교류로 삼고 있는 그 일을 제가 지금 하고 있습니다.

기자: 의원님, 인상 깊었습니다. 인민일보 인민망의 한국지국이 하는 역할의 일부가 한국에 중국을 알리고 또 역시 중국에 한국을 보도하는 이런 양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의원님께서는 저희보다 더 막중하시고 귀한 임무를 잘 수행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아주 인상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재천 국회의원: 고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일게요. 이를테면 제가 중국 차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중국 대사관 분들이 자주 오시는데 차 문화 교류를 의회 차원에서 해 보고 싶습니다. 일반인과 스님들 사이에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중국 차 문화를 사랑하는 중국 정치인이나 다예 전문가들이 나오시면 국회에 초청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국회 로비에서 차 시연회도 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최치원 선생도 당시 고향 신라에 보내는 편지에 “차와 약을 보내노라.”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완당 선생도, 완원 선생을 만날 때 베이징에서 용봉승설차를 마시고는 죽을 때까지 그 차 맛을 못 잊습니다. 그래서 그 글이 많이 나와요. 심지어 자시 호를 완당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만 ‘승설 노인’ 즉 ‘그때 승설차 맛을 못 잊는 노인’ 이렇게 쓴 호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쓴 글씨 돌아가시기 전에 한 달 전에 쓴 글씨는 ‘노완’이라고 돼 있습니다. ‘늙을 노’ 자에 ‘완원 완’ 자. 나는 이제 늙은 완원이 되었다. 완원의 모든 철학과 인생을 나는 체득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스승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우리 최치원 선생이나 완당 완원 선생 간의 교류를 중심으로 차 문화나 또 다른 문화까지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근거들 우리 후손들의 책무가 있다. 중국의 인민들이건 한국의 시민들이건 중국의 네티즌들이건 한국 네티즌들이건 이런 쪽에 대해서도 경제뿐만 아니라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한중 우호 관계를 함께 다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민망 시청자 여러분께 부탁 드리겠습니다.

기자: 감사합니다. 정말 감동 있게 잘 들었습니다.

최재천 국회의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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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editor: 轩颂, 趙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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