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인민망 한국어판 12월 13일] 2019년은 난징대학살 참사 발생 82주년이다. 1937년 12월 일본군은 난징대학살 참사를 자행해 30여만 명의 무고한 중국인과 무기를 쥐지 않은 군인들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참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치유하기 힘든 고통과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야 했다. 천훙란(岑洪蘭•오른쪽 위), 1934년 7월 5일생. 1930년, 천훙란의 부모는 그녀와 큰 오빠, 작은 오빠, 동생을 데리고 쑤베이(蘇北)의 고향집에서 난징으로 도망쳐 날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한중문 밖 외벽의 초가집을 불지른 바람에 부모는 그녀와 오빠 둘만 데리고 도망쳤다. 일본군이 천훙란을 안은 아버지에게 총을 쐈는데 총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면서 천훙란은 턱을 다쳤다. 2살도 채 안 된 동생 펀샤오싼은 집에서 산채로 불에 타 죽었다. [번역: 이인숙/ 출처: 신화망]
2/8난징대학살 생존자들은 참혹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송고 때까지 난징대학살생존자원조협회가 영상에 기록한 생존자는 78명에 불과했다. 신화사 기자는 수년에 걸쳐 난징대학살 생존자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생활을 사진첩으로 만들어 역사의 증거로 남겼다. 저우원빈(周文彬•중앙 위), 1938년 1월 22일 출생. 부친 저우중이(周忠義)는 우체국에서 근무했고,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삼촌, 오빠 둘이 있었다. 어느 날 해질 무렵에 일본군이 마을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가족 전체가 황망히 달아났고, 저우원빈 혼자만 집의 요람에서 잠들어 있었다. 일본군이 떠난 후 집에 돌아온 가족들은 요람 안이 피로 얼룩져 있고 저우원빈의 왼발 발가락 3개가 총에 맞아 잘려나가고 없는 것을 발견했다. 저우원빈의 형(당시 11살) 저우원신(周文鑫)은 집 부근에서 놀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쏜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했다.
3/8위창샹(余昌祥•중앙 위), 1927년 10월 19일 출생.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후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 어린 위창샹은 가족과 함께 집 문 앞 부근의 토굴 안에 숨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생부 위비푸(余必福)는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후 시체를 찾지 못했고, 양부는 칼에 7번 찔렸다.
4/8쉬자칭(徐家慶•중앙 위), 1925년 2월 8일 출생. 부친은 그가 8살 때 사망했다. 일본군이 난징에 쳐들어왔을 때 쉬자칭은 가족들과 함께 스구루 부근의 피난소에 숨었다. 어느 날, 쉬자칭과 형, 셋째 매형, 외조부가 살던 집을 보러 나섰다가 도중에 일본 병사 2명과 마주쳤다. 일본 병사들이 쉬자칭의 형, 셋째 매형의 옷을 벗기고 묶은 다음 무릎을 꿇리고 군도를 목에 겨누며 죽이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본 쉬자칭은 겁에 질려 큰 소리로 계속 울었다. 외조부가 제발 살려달라고 사정하면서 그들은 농민일 뿐이라고 설명한 후에야 일본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8우지잉(巫吉英•중앙 위), 1924년 6월 15일 출생. 당시 장쑤성 바오룽현 황메이향 허우탕촌에 살던 우지잉의 부친은 빚 때문에 10살 밖에 안된 우지잉을 난징에 사는 장씨 성을 가진 사람 집에 머슴으로 팔았다. 일본군이 난징에 들어오기 전 주인집 식구들이 피난을 가고 집에는 병든 할머니와 우지잉만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일본 병사 두 명이 문을 부수고 쳐들어와 총검으로 우지잉의 목을 겨누고 있을 때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일본군이 허둥지둥 도망가면서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찔렀다. 다리를 찔린 우지잉은 겁이 나서 할머니를 데리고 도망쳤다. 차이방교 부근의 한 채소밭 부근에서 또 일본 병사와 마주쳤는데 두 사람은 채소밭 옆 집 안의 시체들 틈에서 죽은 척하며 숨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6/8징즈전(經智珍•중앙 위), 1928년 9월 29일 출생. 일본군이 난징을 침입했을 때 네 식구는 마을 아래로 피난을 가서 숨어 지냈고, 나중에는 상하이루 부근의 난민 지역에서 반년을 숨어살았다. 징즈전의 작은 외삼촌 천밍파(陳明發)가 난징 대연병장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외할머니는 충격으로 실성했다.
7/8관순화(關舜華•오른쪽 위), 1925년 8월 10일 출생. 부친은 잡화점을 경영했다. 일본군이 난징에 쳐들어왔을 때 가족이 화이안(淮安)으로 피난을 갔다가 한 달 뒤 난징으로 돌아와 닝하이루에 마련된 난민지역에 숨어 지냈다. 그녀의 삼촌은 중산문 밖의 복숭아밭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됐다.
8/8팡쑤샤(方素霞•중앙 위), 1934년 11월 11일 출생. 부친이 중앙은행 직원으로 식구는 7명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임신 중이어서 거동이 불편했다. 하지만 난징에 침입한 일본군이 도처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와 의논해 난을 피해 도망가기로 했다. 이튿날 밤에 부친이 싼차허에서 뱃사공을 찾았다. 가족은 야음을 틈타 작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도중에 일본군의 기관총 총격을 받아 옆의 배가 명중돼 침몰했다. 가족은 안후이 우장향으로 도망쳐 한 농가에 세들어 살았다. 놀란데다 지친 할머니는 심장병이 발작해 며칠 안돼 죽었다. 팡쑤샤는 놀라서 고열이 내리지 않은 탓에 오른쪽 귀에 염증이 생겨 고막이 찢어지고 귀가 멀었다. 어머니는 조산했고 태어난 여동생은 요절했다. 30여세의 삼촌 팡칭이(方慶宜)는 피난길에 실종된 후 소식이 끊겼다. 한 달여 후 가족이 난징으로 돌아왔으나 일본군이 몽땅 약탈해가고 집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번역: 이인숙/ 출처: 신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