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 August 27, 2014
[인민망 한국어판 8월 27일] 국가기록보관소는 <피로 물든 중국 항일 투쟁, 자료로 보는 실제 역사(浴血奮戰——檔案里的中國抗戰)> 1부 ‘루궈차오(盧溝橋)사변’을 지난 8월 25일에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1937년 7월 7일 밤, 화베이(華北)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중국의 제29군 방어 지역인 루궈차오(盧溝橋) 부근에서 ‘소위’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가 사병 하나가 실종됐다는 구실로 베이핑(北平)의 남서쪽인 완핑현(宛平縣)으로 진입해 수색할 것을 요구했으며 중국 방위군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7월 8일 새벽 5시경 일본군이 완핑현을 포위했고 루궈차오에 있던 중국 방위군을 공격했다. 루궈차오와 완평현의 수비를 맡고 있던 제29군 37사 109여 219단은 지싱원(吉星文) 단장의 인솔하에 반격했으며, 전면적인 항전의 첫 번째 총성이 울렸다.
이후 일본군은 화베이 지역 당국과의 ‘평화 담판’을 기회로 이용해 화베이 지역에 주둔한 군사 수를 늘리는 데 주력했다. 28일, 일본군은 최고사령관 카츠키 키요시(香月清司)의 지휘하에 제29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중국 방위군은 항전을 위해 분기했고, 퉁린거(佟麟閣)와 자오덩위(趙登禹) 등 장군이 전사했다. 7월 29일~30일에는 일본군이 베이핑과 톈진(天津)을 잇따라 점령했으며, 화베이 지역의 요충지는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루궈차오사변이 발생한 후 중공군은 즉시 전국으로 통전을 보내 전 민족이 일본군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장제스(蔣介石)도 루산(廬山)서 담화 발표를 통해 일본군과의 대전을 준비하여 국토를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선포했다. 일본군이 도발한 루궈차오사변은 중국 국민의 항전 의식을 더 불태우게 했다. 루궈차오 항전으로 중화민족의 전면적 항전은 서막을 올렸던 것이다. (번역: 김선민 감수: 조미경)
자료 제공: 중국 제2역사기록보관소
원문 출처: 신화망(新華網)
중국의 '그 옛날 그 시절'
http://kr.people.com.cn/203772/310158/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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