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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06월17일 

中 저명한 과학자 별세, 컬러 영정 사진으로 부고…그 사연은?

12:03, June 17, 2022

[인민망 한국어판 6월 17일] 2022년 6월 9일 새벽, 중국공정원 원사이자 저명한 감광 재료 전문가 쩌우징(鄒競)은 병환 치료 중에 톈진(天津)에서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가족들의 뜻에 따라, 쩌우징 원사가 일평생 몸담은 중국 감광 재료 및 컬러 필름 사업에 대한 특별 공로를 기념하고자 부고에 컬러 영정 사진을 사용했다(중국에서는 보통 흑백 사진을 사용한다).

🌠유학 중 그녀는 필름과 평생의 인연 맺어

쩌우징, 1936년 상하이 출생, 본적 저장(浙江) 핑후(平湖), 그녀는 어릴 적부터 퀴리 부인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아 신비하고 무궁한 화학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희망했다. 

쩌우징 원사가 직접 러시아어로 쓴 필기

1954년, 18살의 그녀는 대학지원서에서 모두 화학 및 화공과를 지망했고, 후에 소련 유학예비생으로 뽑혔는데 당시 뽑힌 6명 가운데 유일하게 여학생이었다. 1955년, 쩌우징은 소련 레닌그라드 영화공정대학에서 국내에는 없는 영화 필름 제조 및 현상인화가공학과를 공부했다. 이때부터 그녀와 ‘필름’은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된다.

🌠국내 신설 영화필름사에서 각종 적외선 필름 연구·제작에 성공

쩌우징은 소련의 필름사 실습 당시, 중국에서 파견한 실습팀을 만났는데, 국내 첫 대형 현대화 필름사, 바오딩(保定)영화필름사[현 중국 러카이(樂凱)집단유한공사]가 설립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인연으로 쩌우징은 1960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생활 여건이 열악한 북방 옛 도시 바오딩을 선택했다. 신설된 영화필름사는 서쪽 외곽의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에 위치했다. 어릴 적부터 윤택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배고픔도 경험하게 되었다. 이때 그녀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특수한 적외선 군용 필름 연구·제작일이었다.

자료 사진

자료도 장비도 없고, 실험실 여건도 너무 열악했지만 쩌우징은 18세 청년 2명과 함께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암실에서 기술적 난제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1960년 말부터 1965년 말까지, 이들은 각종 적외선 필름 연구·제작에 성공하면서 국내 공백을 메운 동시에 당시 시급했던 국방 군용 필요를 만족시켰다.

🌠국내 첫 컬러 필름 제작으로 중국인의 컬러꿈 이뤄

톈진대학교 자료실, 쩌우징 원사가 1978년에 직접 쓴 2개 문건은 매우 귀중한 자료다. 쩌우징은 당시 해외 컬러 영화필름 현황 및 기술 발전방향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동시에 자신의 연구개발 구상안을 제시했다.

문건에서 쩌우징은 “만약 1980년까지 앞으로 2~3년 안에 독일의 이스트먼 5247-Ⅱ형 컬러에 가까운 수준을 만든다면 현재 세계 선진 수준과 15~20년의 격차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안긴 사명이다”고 했다.

이 ‘사명’을 완수하고자 쩌우징은 연구진과 함께 7년간 연구에 몰두하며, 1985년에 중국 1세대 국산 고온쾌속가공 컬러 영화 필름과 상업용 컬러 필름을 연구·제작했다. 1986년에 러카이100 일광모델컬러필름(Ⅱ)이 산업화 생산에 본격 들어가면서 국산 컬러 필름이 처음 도입되어 중국에도 컬러필름 시대가 도래했다.

🌠과학연구 외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그녀 

과학연구 외에도 쩌우징은 문학과 예술도 사랑했다. 가는 곳마다 그녀는 시간을 내서 현지 박물관을 꼭 둘러본다. 딸 셰훙(謝紅)은 “어머니는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노래 ‘모스크바 근교의 밤’이 들리면 러시아어로 따라 불렀다. 그리고 집에 있는 러시아어 문학작품들은 그녀가 평소 아끼던 것들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쩌우징 원사여, 평안히 가세요!

번역: 조미경

원문 출처: 인민망/자료 출처: CCTV뉴스 위챗 공식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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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editor: 汪璨, 王秋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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