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이 사태가 중국인들의 해묵은 반일정서에 불을 붙여 중국 내 반일시위가 양국 수교 이래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 당국도 시위대가 이성적 항의를 할 경우 막을 도리가 없다며 묵인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대일 규탄 운동은 우리에게 결코 불구경거리가 아니다.
전체 5개 섬과 3개 도초(島礁•간만의 차에 따라 암초가 됐다 섬이 됐다 하는 바위)로 이뤄진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에서는 1884년 오키나와 주민이 처음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댜오위다오를 중국 영토로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1865년 작성된 중국 지도에 댜오위다오가 푸젠(福建)성에 속한 섬으로 표시돼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중에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1951년 일본이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국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1971년 관할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독도는 어떤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동해상 독도를 발견하고 이 섬을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1910년 조선을 일본에 합병시켰다. 이어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했다.
나는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메이지유신을 통해 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한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가 말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개혁의 명분으로 삼았다. 아시아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유럽 국가와 같은 반열에 서서 이웃 국가들을 침략함으로써 자국의 영역을 키우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1924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쑨원(孫文)은 일본에 “공리강권(功利强權)을 추구하는 서양 패권의 응견(鷹犬)이 될 것인가,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를 물었다. 결국 일본은 아시아 침략을 추구하다가 패망했다.
그 뒤로 전개된 역사도 결코 일본의 망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시아는 바야흐로 세계사의 중심이 됐다. 미국도 아시아 중시 정책을 공식화했고 일본도 결국 탈아입구의 미망을 버리고 아시아 회귀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회귀의 대전제는 잘못된 과거를 확실히 반성하고 청산하는 것이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고 댜오위다오를 국유화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 청산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일본의 잘못된 태도에는 미국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태평양전쟁의 전범은 비교적 엄히 다스리면서도 아시아 침략의 원흉들에 대해서는 덜 엄격했던 점이다. 그 결과 전후 일본의 정치는 전범과 그 후예들이 좌지우지하면서 과거 청산이 독일처럼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여기에 오늘날 동북아시아 정세 혼란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제 한중 양국은 독도나 댜오위다오 문제를 자국만의 문제로 보는 좁은 시각을 넘어서서 아시아적 차원에서 일본의 잘못된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공동 협력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일본이 철저한 과거 청산 없이 아시아로의 순조로운 회귀가 불가능함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