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일, 정초부터 김태희와 비의 열애설이 보도됐다. ‘핵폭탄급’ 스캔들인 만큼 사실여부에대한 관심도 뜨거웠지만, 파파라치식 보도가 잇따르면서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배우 선학은 이 논란을 보면서 “파파라치 100명이 따라 붙어도 좋으니, 연기만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명(無名)배우는 일거수일투족을 주목 받아 괴롭다는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84cm의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배우 선학은 데뷔한 지 20년이 됐다.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다. 맡은 역할의 비중이 워낙 작기 때문이다. “연기력이 출중하면 단역으로 출연해도 관객이나 시청자가 다 알아보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씬 스틸러(뛰어난 연기력으로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배우를 일컫는 말)가 되려면 어느 정도 분량이 보장되야 한다. 게다가 본인의 연기력도 중요하지만 작품도 흥행에 성공해야 하고, 캐릭터도 사랑을 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단역 혹은 조연배우가 인기를 끌려면 천운이 따라야 한다”고 답했다.
출연료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방송사 드라마 출연료는 최저 6등급에서 최고 18등급까지 총 13단계로 구분되는데, 그는 8등급에 속한다. 경력과 출연작의 수에 비하면 터무니 없는 등급이지만 등급을 상향 조정하는 기준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이다. 데뷔 20년 차 배우로서 이럴 때는 ‘일반 회사에 다녔더라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회당 출연료’로 지급받아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제작사 측에서 아무리 적은 액수를 제시해도 ‘작품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 쪽의 요구에 모두 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은 액수도 문제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많다. 한 해 출연료를 다 합쳐도 500만원이 되지 않아, 부모님께 손을 벌린 적도 여러 번이다. 최근에는 PC방 야간 아르바이트도 병행하고 있다. 선학은 “결혼한 선배들이나 동료들은 더 힘들어한다. 대부분이 아르바이트를 2~3개 정도는 하고 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은 연기만 해서는 먹고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 위해 오디션도 참가해 보지만 대부분 서류전형에서 떨어진다. 제작자는 ‘신선한 인물’을 원하고, 그에 따른 공급은 넘쳐나기 때문이다. 오디션에 참가할 때는 경력이 오히려 ‘짐’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줄 자신이 있는데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마저 어려운 상황이다. 이 쪽 일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계속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선학은 “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들이 토크쇼에 나와 무명시절의 고충을 토로하는 것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저 자리에 서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연기 공부에 매진하거나 운동을 하는 등 자기관리를 하며 ‘그 날’을 위해 칼을 갈고 있다고 한다. 일거수일투족 관심을 받는 ‘톱스타’들도 배우지만, 잠깐의 출연을 위해 혼신을 쏟아 붓는 그도 배우다.
박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