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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의 고찰<8> 권병현 미래숲 대표, UN녹색대사 편

13:25, March 12, 2013

권병현 대표

권병현 대표는 외교관 지망생 시절부터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당시에는 중국이 멀기만 한 나라였지만, 언젠가는 관계를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십 년 후, 권 대표는 한국팀의 실무를 맡아 양국의 수교를 성사시켰다. 그의 막연한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최대 목표를 이뤄냈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01년 ‘미래숲’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며 사막에 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어떤 이는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이 있는데 그마저 다 잃을 것이냐”며 극구 말렸다. 하지만 그는 사막으로 떠났고 나무를 심을 수조차 없었던 땅을 ‘숲’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권병현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나눴다.

▶ 1992년 수교 당시, 수교협상에 가담한 실무팀이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교섭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갔나?

▷ 사실은 성사될 수 없는 협상이었다. 수교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극비리 회담을 가져야 했고, 주변국과의 관계 때문에 극비리 회담이 아니면 협상을 타결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이 회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10여명이 안 되었다. 이상옥 장관에게 밀명을 받았는데 이 것이 알려지면 모두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은 물론, 협상이 바로 결렬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었고, 엄청난 정보력을 갖고 있었다. 한국 언론이 모르는 외교 비밀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보안을 유지하려면 단기에 해결해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는 영화 ‘007’보다 더 긴박했다. ‘007’은 그저 영화지만, 나에게는 내 생명이 걸린 일이었다. 또한, 협상이 결렬됐다면 한국과 중국 모두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됐을 것이다. 사무실에는 아버님께서 편찮으셔서 시골에 가봐야 한다고 했고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나서 시내의 비밀아지트에 들어가 작업을 했다. 내가 움직이는 동선까지도 철저히 위장했다. 내가 중국에 들어가는 것이 들키면 거기서 협상은 끝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홍콩으로 날아간 후, 새벽에 몰래 나와 차이나 에어라인을 타고 베이징에 갔다. 비행기 뒷문으로 내리니 중국의 대표단이 나와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실무팀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위장해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상황이 정말 ‘007작전’보다 더 긴박하고 치밀하게 돌아갔던 것 같다.

▶ 수교협정을 체결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바라보며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소감이 어땠나?

▷ 우선 안도했다. 비밀이 외부에 누설되기 전에 협상을 타결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협상 일주일 전에는 외부에 알려져도 괜찮았다. 그 때부터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일인 8월 24일, 새벽에 눈이 일찍 떠졌다.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조어대(釣魚臺, 영빈관)에 갔는데 그 날 날씨가 참 청명하고 하늘도 깨끗했다. 조어대의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 때 ‘수교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하고 실감을 했다. 수교가 맺어지지 않았더라면, 중국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릴 수 있었겠나. 수교가 이뤄진 것과 이뤄지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나라 사이의 문이 열리면서 나도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그 해방감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 1998년 주중대사 재임 시절부터, 사막화 방지를 위해 노력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계기로 중국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됐다. 1998년에 주중대사로 부임했는데 그 때 짙은 황사가 베이징 전역을 덮쳤다. 운전할 때, 자동차 와이퍼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처음 겪어보는 황사에 정말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서울에 있는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황사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하더라. 이는 당장 내 문제, 나의 가족문제였다. 이런 생각이 사막화 방지 사업을 하는 데 시발점이 됐다. 대사관 직원들에게 황사 문제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서 보고서를 받았는데, 중국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막이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이 보고서를 보고 중국 측에다 나무를 심어 사막을 막아보자고 제안했다. 중국 측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자연의 문제를 인력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막을 막을 만큼 충분한 재원이 없다고 했다. 포기할 수가 없어 한국 측에 부탁을 했다. 한국의 KOICA(한국국제협력단)가 이미 중국에서 철수를 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는데, 내가 환경문제는 개발도상국에 주는 원조자금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2년을 넘게 설득하여 KOICA 자금을 얻었다. 한국의 산림녹화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산림청에 노하우를 중국에 전수하자고 했다. KOICA의 자금과 산림청의 노하우를 엮어 나무를 심을 수 없다고 포기한 지역 다섯 곳(신강위구르자치구, 영하회족자치구, 내몽고자치구, 감숙성, 귀주성)과 베이징 근처의 작은 사막 한 곳으로 떠났다. 이 일로 2000년 8월에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만나기도 했다. 그 때 내가 한국의 경제발전에는 빛과 그늘이 따른다고 말하며, 만약 한국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쓰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했더라면 지금보다 완전한 성공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우리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특히 사막화, 황사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건의했다. 두 달 뒤에 주 총리가 한국에 와서 사막화, 황사 방지를 위한 한중 간의 협력을 합의했다.

그 때부터 한국과 중국이 사막화 방지를 위해 함께 노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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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t(Editor:轩颂、赵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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