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6  中文·韓國

中외교관이 발급한 상하이비자, 무수한 유대인 구해

출처: 인민망 한국어판  10:52, May 13, 2015

中외교관이 발급한 상하이비자, 무수한 유대인 구해
허펑산(何鳳山)

[인민망 한국어판 5월 13일]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삼키자 당시 예술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생활하던 유대인들에게도 역경이 불어닥쳤다. 이들 유대인들의 생사 위기 앞에 중국의 한 외교관이 상하이 비자로 수 많은 유대인을 구해 중국이 유럽의 반파시즘 전쟁 투쟁을 도운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했지만 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 그만 묻혀버리고 말았다.

현재 비엔나 시가지 베토벤광장에는 당시 유대인을 구한 허펑산(何鳳山) 비엔나 주재 중국 총영사의 기념 편액이 놓여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암흑의 시기에 이 중국 외교관과 그의 동료들은 함께 엄청난 압박을 이겨내며 심지어 영사관이 나치에 의해 강제 몰수 당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무실을 자비로 임대해 1938년 이후 2년간 유대인을 위해 수 천만 개의 상하이 비자를 발급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구했는지 모른다.

만약 유대인들이 제때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 당하는 것은 물론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일부 민주주의와 자유를 부르짖던 국가들은 몸을 살려 유대인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으며, 유대인 문제를 두고 프랑스에서 열린 에비앙 회담에 참석한 32개 국가 모두가 유대인에게 비자 발급을 거절하기로 결정해 유대인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수 십 곳의 영사관을 찾은 후 거의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중국 영사관을 찾아와 생명의 비자를 발급 받고 겨우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국 외교관의 선행은 순식간에 엄청난 효과를 불러 일으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머나먼 동방에 있는 한 중국의 도시가 유대인이 생존할 수 있는 피난처라고 알려지면서 상하이는 세계에서 유명한 유대인 피난처가 되었고 엄청난 유럽의 유대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이 가운데 허펑산 총영사는 유럽의 유대인이 상하이로 갈 수 있도록 한 매개 역할을 했다.

유명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유대인을 구한 상인 쉰들러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져 그가 당시 구한 유대인 명단 또한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늘 조용히 일을 처리하던 허펑산 중국 외교관은 당시 자신의 행적을 거의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족들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죽고 10여 년이 지난 후에 오랜 세월 잊혀졌던 역사가 점점 드러났지만 당시 허펑산이 구한 유대인 명단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도대체 몇 명의 유대인을 구했는지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허펑산 그는 왜 자신의 행적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지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허펑산 회고록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유대인들의 역경을 보면서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단순한 도리처럼 들리지만 당시 중국은 일본군의 침략을 당한 상태라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시기였고 그럼에도 중국 외교관이 인도주의 원칙을 고수하며 먼 유럽의 유대인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은 위대한 국제주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자 인성(人性)의 위대함과 훌륭함이 표출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중국 외교관 허펑산의 행적은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인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 외교관이 유대인에게 발급한 상하이 비자는 ‘생명의 비자’로 인정받았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관련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고 유럽 대륙도 일찍이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접어 들었지만 이 역사적 사실은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된다. (번역: 조미경)

원문 출처: 신화망(新華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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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editor: 軒頌, 樊海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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