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9  中文·韓國

역사의 진상 폭로한 日관동군 후손의 친필 기록

13:43, January 29, 2014

[<인민일보> 01월 28일 03면] 필자는 일본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부친은 다케후지 슈이치이다. 부친은 2차 대전 시 일본 제6사단의 사병이었으며, 그가 군복무 기간에 남긴 일기는 한국전쟁 및 여성인권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친의 군복무 경력에 대해 점차 의문을 갖게 되었고, 전쟁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뚜렷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즉, 이 전쟁은 어떠한 각도에서 보더라도 침략 전쟁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나는 전쟁의 진상을 알고 싶고,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라며 부친과 왕래한 서신을 통해 필자는 자신의 결심을 부친에게 피력했다. 장기간의 왕래를 통해 부친은 필자에게 마음을 열고, 농민의 후손이었던 부친이 징병을 통해 천황폐하의 백성이 되었던 과정을 털어 놓았다.

1990년대에 부친은 자신이 오랫동안 소장해 온 군복무 중의 일기와 1938년~1946년 기간 동안 부친이 받았던 300여 통의 편지를 필자에게 전달했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엄청난 비극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일본 사병이 현지 여인들을 무자비하게 범했던 사실로 인해 국제 여론으로부터 빗발치는 항의와 반감을 조성했다. 일본군 당국은 군인들이 성병에 감염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의 위안소를 세우고 신속하게 위안부를 강제 징집했다. 1938년 초반에 제1차 일본군 위안소가 상하이에 세워졌다.

필자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었다.

“1938년 2월 21일. 오늘은 외출을 허가 받은 날이다. 나와 이시카와 두 사람은 우선 ‘조선’을 ‘정복’했는데, 그녀는 경상남도 출신으로 이번이 네 번째 ‘정복’이다. 이어 ‘중국’을 정복했는데, 중국 여인은 이번이 처음이다.”

“1938년 3월 13일. 또 한 번의 외출이 허가되었다. 나와 오다, 이시카와 세 사람은 위안소에 갔다. 오늘은 ‘일본’, ‘중국’, ‘조선’을 잇따라 ‘정복’했다.”

……

부친의 일기에는 중국 위안부가 강제 징집된 기록이 있는데, 일본 군대의 무력 강탈 및 부녀자 납치 등에 관한 서술이다.

필자는 일기를 읽는 도중 부친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9월 2일 우리는 중국 사복 군인을 체포했다…… 우리 대열 소속의 모든 군병들이 각자 한 번씩 칼로 찔렀다” 부친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정황에 대한 묘사였다. 이후 1주일 간 부친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으며, 음식을 넘길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일기도 잠시 쓰지 않았다. 사복 군인 부대가 과연 중국 정부가 파견한 중국 사병인지 여부는 검증된 적 없었고, 일본 군대는 중국인에 대한 살해 행위를 ‘천황폐하의 완벽한 사병’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담력 훈련’이라고만 강조했다. 이로써 필자의 부친은 점차 살육이 습관화 된 ‘천황폐하의 사병’으로 변모해 갔다.

부친과의 대화 내용 및 부친이 전시에 기록한 일기와 서신 내용에서 필자는 당시 일본이 범한 전쟁 만행을 알 수 있었다. 일기 내용은 부친 세대의 침략 행위가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국민들에게 가져온 아픔을 보여주었고, 일본 우파가 침략에 대해 부인해 온 사실을 낱낱이 깨뜨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써 역사의 진상을 밝히는 데 큰 힘을 실었다. 비록 부친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일기와 서신을 남김으로써 필자에게 진상을 밝히는 책임을 부여했다.

위안부 피해자가 아직도 생존해 있는 현재, 일본 정부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반드시 공개 사죄하고 그 법률적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전쟁을 겪은 부친 세대는 모두 ‘전쟁은 또 다시 발생할 수 없다’는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저자 다나카 노부유키는 일본의 평화 운동가)
(Editor:轩颂、赵宇)

관련기사

더보기

포토뉴스

더보기
  • 정치
  • 경제
  • 사회
  • 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