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
[인민망 한국어판 1월 19일] 중당(中唐)과 만당(晚唐)의 교차 시기에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은 유명한 시 <과화청궁(過華淸宮)>에서 ‘장안에서 돌아보니 비단을 쌓아 놓은 듯하고, 산꼭대기의 수많은 문들이 차례로 열리는구나. 질주하는 말이 일으키는 먼지를 보고 귀비가 웃네, 여지(荔枝)가 실려 온 줄은 아무도 모른다네’라고 썼다. 두목의 시구는 양옥환(楊玉環)이 여지를 즐겨 먹었고, 당현종(玄宗)이 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역마를 시켜 여산(驪山) 화청궁으로 여지를 운송하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사료 기재에 의하면 당현종은 겨울과 봄에 여산의 화청궁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겨울과 봄은 여지가 아직 익지 않았을 때였다. 진인각(陳寅恪)은 <원백시전정고(元白詩箋証稿)>에서 ‘당대의 신빙성 있는 자료에 의하면 시간, 공간적으로 당현종과 귀비가 여름에 여산에 같이 있기가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즉 양귀비는 겨울에 여산에서 여지를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름에는 신선한 여지를 먹었을까?
<신당서•후비•양귀비전(新唐書•后妃•楊貴妃傳)>의 기록에 의하면 ‘귀비는 여지를 아주 좋아해서 먹고 싶어 할 때는 말들이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으로 운송해 왔다’라고 적혀 있다. 믿을지 말지는 양귀비가 먹었다는 여지가 어디에서 ‘공수’된 것인지를 보면 된다.
예로부터 조정에 여지를 진상한 산지는 영남(嶺南)과 부주(涪州) 두 곳이라는 설이 있다. 영남은 중국 오령(五嶺) 이남의 지역을 말한다. 당나라 이조(李肇)가 쓴 <국사보(國史補)>에는 ‘촉지[蜀地: 지금의 사천(四川)성 일대]에서 태어난 양귀비는 여지를 좋아했다. 남해(南海)의 여지가 촉지의 것보다 더 맛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진상하게 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사료에서 말하는 남해란 당시의 남해군, 즉 오늘의 광주(廣州) 경내를 말한다. 하지만 당나라 시대에 빠른 말로 여지를 운송한다 하더라도 영남에서 장안까지는 5-10일은 걸렸을 것이다.
조정에 진상하는 여지는 부주에서 온 것일 가능성도 있다. 부주는 현재의 중경(重慶) 부릉(涪陵)이다. 양귀비는 어릴 때 촉지에서 자랐다. 그녀는 여름에 고향에서 먹던 여지를 먹고 싶어 했을 것이다. 부주에서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陝西)성 서안(西安)시]까지는 약 1,000km로 영남에서 장안까지 거리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현지의 지방지에는 ‘양귀비는 여지를 좋아했다. 부릉에서 출발해 달주(達州)를 경유해 서향(西鄉)을 지나고 자오곡(子午谷)으로 가서 장안까지 3일만에 도착해 여지의 색과 향기가 변하지 않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양귀비가 여름에 신선한 여지를 먹었다면 광주나 중경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장안에서 더 가까운 중경에서 운반하더라도 족히 3일은 걸린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여지는 가지를 떠나 하루면 색이 변하고, 이틀이면 향이 변하고, 삼일이면 맛이 변하고, 사오일이 지나면 색, 향, 맛이 다 상한다’라고 적었다. 촉지 지방지에 기재된 ‘장안까지 겨우 3일이 걸렸고, 색과 향이 모두 변하지 않았다’는 상황이 정말 존재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양귀비가 먹은 여지는 신선도 유지 처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나라 때 여지의 운송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신선도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1. 밀랍처리(waxing)
<수서•오행지(隨書•五行志)>에는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귤을 좋아했다. 황귤을 따서 밀랍으로 밀봉해 황제에게 바쳤다. 며칠이 지나도 변함없이 신선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방법은 아직까지 사용되는 과일 보관방법이다. 과일에 밀랍을 바르면 표면에 얇은 막이 형성되면서 과일과 공기의 접촉을 차단해 과일의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줄이고 과일의 호흡작용을 낮추므로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 당나라 시대의 여지도 수나라 때의 이 방법에 따라 보관했을 가능성이 크다.
2. 죽통에 보관하기
<광군방보(廣群芳譜)>에는 ‘시골 사람들은 늘 신선한 대나무 숲에서 큰 대나무를 잘라 여지를 그 안에 넣고 죽순 껍질로 진흙을 싸서 틈새를 막고 신선하게 보관한다”고 기록돼 있다.
3. 나무 그루 옮겨심기
송(宋)나라 양극가(梁克家)는 <(순희) 삼산지[(淳熙)三山志]>에 송나라 휘종(徽宗) 연간에 진상하는 사람이 복건의 여지 나무를 경성 개봉(開封)으로 옮겨와 심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이는 송나라 시대의 이식기술이다. 당나라 시대에 존재했었는지는 사료 기록에 없다.
따라서 양귀비는 촉지에서 운송해 온 신선 기술로 보존된 신선한 여지를 먹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겨울에 화청궁에서 양귀비가 온천을 하면서 신선한 여지를 먹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번역: 이인숙)
원문 출처: CCTV
출처: 인민망 한국어판 | (Web editor: 實習生, 王秋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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