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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05월17일 

진시황, ‘선양’ 생각한 적 있다? ‘분서갱유’ 다른 내막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kr@people.cn
09:25, May 17, 2018
진시황, ‘선양’ 생각한 적 있다? ‘분서갱유’ 다른 내막 있다
(자료사진)

[인민망 한국어판 5월 17일] 천 년에 한 번 나옴직한 황제라는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 호칭을 얻은 진시황(秦始皇)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상 최초의 황제이자 가장 논쟁거리가 많은 황제 중 한 명이다.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문자, 수레바퀴 폭, 도량형을 통일했다는 등 공적이 과실보다 많다고 변호한다. 반면 폄훼하는 이들은 그가 음험하고 잔혹하고 포악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잔인한 품성을 가진 군주의 전제통치에서 벌어졌던 잔학하고 피비린내 나는 일들은 신기할 것이 못 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은 진시황의 일생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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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진시황은 생김새조차도 높은 콧대, 길고 좁은 눈, 새가슴, 승냥이나 이리 같은 목소리, 인색하고 잔인한 성격 등 매우 냉혹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어린 시절 조(趙)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진시황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비단 그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의 진실한 사람 됨됨이도 있다.

진시황 ‘선양’ 생각한 적 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진(秦)나라가 만세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고 계승자들은 2세, 3세로 부르도록 하는 등 새로운 제호(帝號)로 바꾸었다. 이는 『사기』에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진시황은 처음에 ‘선양(禪讓: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물려줌) 제도’를 통해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주장이 서한(西漢) 시대부터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괴팍하고 잔혹하며 의심병이 심한 진시황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사료에 이런 확실한 단서가 있기 때문에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믿기 시작했다.

(자료사진)

서한 유향(劉向)이 쓴 『설원•지공(說苑•至公)』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군신들을 모아 놓고 국가정권 인수인계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그는 “고대 오제(五帝)가 선양을 했고, 삼왕(三王)은 대대로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대들은 어떤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 짐은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포백령(鮑白令)이 “천하가 모두의 것이라 여긴다면 재덕을 겸비한 자에게 양위해야 하고, 천하를 자신의 재산으로 여긴다면 가족에게 대대로 계승해야 합니다. 이로 보아 오제는 천하를 모두의 것이라 여겼고, 삼왕은 천하를 집으로 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시황은 하늘을 우러러 “짐의 덕이 오제에 비할 수 있으므로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사직(社稷)을 관리하도록 할 수 있는데 누가 짐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라며 탄식했다. 포백령은 “폐하가 행하신 것은 하(夏)나라 걸(桀)왕이나 상(商)나라 주(紂)왕[걸•주: 고대 중국에 있어서 폭군음왕(暴君淫王)의 전형]의 도인데 어찌 오제가 현자에게 양위한 것을 생각하실 수 있사옵니까, 이는 폐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대노하여 “포백령, 앞으로 나오너라! 네가 무슨 근거로 내가 걸왕이나 주왕의 도를 행했다는 것이냐? 네 말이 이치에 맞으면 살려 두겠지만 맞지 않는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포백령은 “폐하께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고 수천 명의 후궁을 두었습니다. 자신의 향락을 위해 백성의 재물을 다 썼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삐뚤어지고 이기적이라서 자기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자신이 공덕이 모든 군주를 압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폐하의 덕을 어떻게 오제와 비할 수 있사오며, 어떻게 천하를 관리할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까?”라고 침착하게 고했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 지난 후에 진시황은 “포백령의 말로 내가 신하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구나”라고 말하고 더 이상 양위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과거 사람들은 『사기(史記)』의 기록을 절대적으로 신임했으므로 『설원(說苑)』의 기록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진시황이 선양을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은 『사기』의 기록에 없으며 후세 학자들 역시 『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해당 내용을 믿지 않았다.

실제로 진시황이 선양을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 전국(戰國) 시대 때 제위를 유능한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설이 한 때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왕위를 선양한 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로 굳게 믿었을 뿐 아니라 이를 모방하는 이도 있었다.

진시황은 전국 통일에 성공하고 나서 자신의 공덕이 모든 제왕을 능가한다고 믿었으므로 당연히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고대 성현 군주와 비할 수 있다고 여겨 양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떨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어쩌면 쇼맨십에 불과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일 수도 있다.

이를 논증할 증거는 없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준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진시황의 인품에 대해 전제폭군에게도 이처럼 대의명분적인 사적(事迹)이 있었다는 새로운 평가를 해야 한다.

‘분서’만 있었고 ‘갱유’는 없었다

진시황의 사람 됨됨이에 대한 호불호에 상관없이 우리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한 번에 4백여 명의 유생을 산 채로 묻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시황의 악명 높은 ‘분서갱유’ 사건에 대해 학술계에서는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자료사진)

먼저 ‘분서(焚書)’를 살펴보자.

기원전 213년은 진시황이 재위한 지 34년이 되는 해였다. 진 왕조가 창청(長城: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남월지(南越地)를 정벌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시황은 함양(鹹陽) 황궁에서 군신들과 잔치를 열었다.

부사 주청신(周青臣)이 진시황에게 술을 따르는 기회를 틈타 시황의 공덕을 칭송하며 “예전에 진나라는 아주 작아 땅이 천리를 넘지 못했는데 폐하의 영명함 덕분에 천하를 평정해 오랑캐를 쫓아냈고 일월이 비추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사옵니다”라고 아첨했다. 이어 그는 또 군현제(郡縣制)를 크게 칭찬하면서 진시황이 제후들에게 영토를 나눠주는 분봉제(分封制)를 군현제로 바꾼 후 전쟁의 걱정이 없어져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으니 고금을 통틀어 그 공덕을 비할 이가 없다고 칭송했다.

주청신의 말이 아부성 멘트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진술한 바는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이 말은 뜻밖에도 순우월(淳于越)의 불만을 샀다.

순우월은 고대의 것은 모두가 좋고, 당대의 것은 모두가 나쁘다고 주장해 온 인물이었다. 주청신이 군현제를 찬양하면서 분봉제를 폄하하는 말을 하자 순우월이 분연히 일어나 “상나라, 주나라 시대에 봉토를 자제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사직을 천년 가까이 유지할 수 있었고, 자제와 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것은 그들이 국왕이 서로 보살피고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사옵니다. 오늘날 시황께옵서 천하를 가지고 계시면서 자제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지 않으시니 만약 정권을 찬탈하는 인물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막아내시겠습니까? 주청신이 폐하께 이 점을 아뢰지 않은 것은 폐하 앞에서 아첨한 것이지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고했다.

순우월과 주청신은 본래 악감정은 없었다. 이 논쟁은 순전히 관점의 차이로 문인들끼리 서로 경시하는 대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며 어떤 실질적인 악결과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승상 이사(李斯)가 끼어들면서 상황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사는 “삼황오제가 나라를 다스린 것에는 각자의 법도가 있었고 모두가 잘 다스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천하의 대세에 따라 다른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대업을 이루어 만세의 공을 세웠는데 어리석은 유생이 어찌 그런 이치를 알겠습니까, 순우월이 삼황오제를 예로 든 것을 본받을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당시 제후들은 서로 싸웠고, 모두가 천하의 지식인들을 불러모으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고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이 농공업에 힘쓰고 있으니 지식분자들은 법률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도(正道)입니다. 지금 유생들이 현재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고대의 선례로 현재가 맞지 않다고 하면서 백성을 미혹시키니 신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폐하에게 간언합니다. 과거 천하가 혼란스러웠을 때 각자의 자기의 의견만 고집했기 때문에 제후들이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모두가 고대의 선례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데 감언이설은 한 마디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두가 국가의 제도가 아닌 엉터리 학술을 존숭합니다. 만약 폐하가 천하를 통일한다면 사상을 통일해야 합니다…신은 우리 왕조를 쓴 역사가 아닌 것들을 모두 불태우기를 청하옵니다. 박사관의 직책만 빼고 천하에 감히 시서백가어(詩書百家語)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지방관들로 하여금 불태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고 말했다.

이사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요지는 당대를 좋게 평가하고 고대의 평가에는 인색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옛날의 것을 가지고 지금의 것을 비난하고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분서를 제안하고 엄격한 조치로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사가 겨냥한 것은 ‘진나라 기록(秦紀)’ 이외의 역사 저작이었지 유가의 『시경』 『서경』 및 제자백가의 서책을 진시황에게 전부 불태워 없애기를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이사전(史記•李斯轉)』에서도 이 일을 언급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이사의 말을 옮겨 “신은 문학, 시(詩), 서(書), 백가어(百家語)를 없애기를 간하옵니다”라고 적었다. 이사는 시사백가어에 대해 ‘수거(去)’라고만 했을 뿐 확실하게 ‘불태워야(燒)’ 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 말 다음에 “시황께서는 이를 논의하게 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시, 서, 백가어를 수거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수거한다(收)’이지 ‘불태운다(燒)’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시서 및 제자백가의 서책은 결코 전부 소각되지 않았고, 진 왕조의 중앙정권과 해당하는 정부 관원들이 소장했을 뿐이고, 목적은 ‘우매한 백성’을 위해서였지 훼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분서’가 모든 책을 불태우지 않았다면 ‘갱유(坑儒)’는 정말로 ‘유생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묻어 죽였을까’?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갱유’ 사건은 진시황 35년(기원전 212년)에 있었던 일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이날 진시황은 수레를 타고 양산궁(梁山宮)으로 가고 있었다. 수행하는 사람과 마차가 무척 많았다. 산 정상에 멈추어 쉬고 있을 때 우연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던 진시황은 승상의 수행원이 아주 많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환관이 이런 미세한 동작을 발견했다. 이 환관은 승상의 친구였다. 그는 황제가 승상의 마차와 말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것 같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며칠 후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진시황은 당시 자신의 곁에 있던 환관들을 모조리 죽여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 후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으러 보낸 방사 두 사람이 진시황이 권력을 탐해 독단적으로 결정한다고 비방하고 재물을 사취해 도망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알게 된 진시황은 크게 노해 400여 명을 잡아들여 죽였다.

죽임을 당한 400여 명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서한 이후 사람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유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사기•유림열전(史記•儒林列傳)』에서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술사(術士)를 묻었다’고 언급했다. 술사는 유생과 다르다. 술사는 방사(方士)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고대에 신선방술을 신봉하던 사람이다.

진시황이 유생을 묻었다고 하는 이유는 사마천이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에서 생매장된 사람이 ‘생(生)’이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나라 시대 이전에는 방술사도 ‘생’이라 불렀으므로 진나라 시대의 ‘생’은 전적으로 유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갱유’는 진시황이 죽고 백 년 후에 나타난 말이다. 따라서 혹자가 ‘갱유’라는 하는 것은 서한의 문인들이 진시황의 폭정에 분노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에게 강제로 덮어 씌운 실제에 맞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진시황이 갱유를 하지 않았음을 논증하긴 했지만 생매장 당한 ‘생’ 중 일부는 유생이나 예비 유생이 아니었을까?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사람을 보냈다. 일부 유생들은 진시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술사들 틈에 끼어들어 이를 기회로 공명과 관록을 얻길 바랬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진시황에 의해 생매장 당했다. 또 방술사 대다수가 지식인이었으므로 예비 유생으로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살육이 일어나게 되면 무고한 사람도 죽임을 당할 수 있으므로 생매장 당한 ‘생’ 중 일부는 유생으로 오인 받아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상술한 관점들은 종합하면 ▲진시황은 책을 불태웠지만 모두를 다 불태우지는 않았다. ▲함양에서 일어난 ‘생’을 파묻은 사건은 주로 방술사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유생들에게도 화가 미쳤다. ▲진시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지막지하지 않다. 그가 한 일은 모두 원인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일을 지워버릴 수는 없지만 그 배후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우리 후손들이 역사 인물의 진실된 면모를 바로 알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이 글을 통해 사람들의 진시황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를 바란다. (번역: 이인숙)

(자료사진)

원문 출처: 인민망(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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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민망 한국어판  |  (Web editor: 李正, 王秋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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